다시라카 황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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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다시라카 황녀는 닌켄 천황과 가스가노오이라쓰메 황녀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게이타이 천황의 오오키사키가 된 인물이다. 그녀는 게이타이 천황의 정통성을 강화하기 위한 정략적 결혼을 통해 훗날 긴메이 천황이 되는 아메쿠니오시하라키히로니와노 미코토를 낳아 일본 황실의 조상신으로 이어지게 했다. 현재 덴리시에 있는 니시토노츠카 고분이 그녀의 무덤으로 추정되나, 니시야마즈카 고분이 실제 무덤일 가능성도 제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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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라카 황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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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정보 | |
이름 | 다시라카 황녀 (手白香皇女) |
직위 | 황후 |
배우자 | 게이타이 천황 |
자녀 | 아메쿠니오시하라키히로니와 왕자, 긴메이 천황 |
왕가 | 일본 황실 |
아버지 | 닌켄 천황 |
어머니 | 가스가노오오이라쓰메 황녀 |
생애 | |
재위 기간 | 507년 – 531년 |
출생 | 닌켄 천황 2년 (489년 이전) |
사망 | 불명 |
능묘 | 후사무타 능 (나라현 덴리시) |
일본어 정보 | |
휘 | (일본어 정보 없음) |
시호 | (일본어 정보 없음) |
2. 생애
다시라카 황녀는 닌켄 천황의 딸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유랴쿠 천황의 딸인 가스가노 오이라쓰메이다.
手白香皇女|다시라카 황녀일본어는 닌켄 천황과 유랴쿠 천황의 황녀 가스가노오이라쓰메 황녀의 딸로, 게이타이 천황과의 사이에서 긴메이 천황 (아메쿠니오시하라키히로니와노미코토)을 낳았다.
부레쓰 천황은 자식을 두지 못하고 젊은 나이에 서거하였다. 선대 유랴쿠 천황이 벌인 왕족·호족 숙청으로 인해 다른 남자 왕족은 거의 남아있지 않았고, 에치젠국(越前国)에서 오진 천황의 5세(世) 손이 되는 방계 왕족 오호도 왕(男大迹王)이 오키미로 옹립되었다(게이타이 천황).[7]
[1]
서적
Transactions and Proceedings of The Japan Society, London. Supplement I. Nihongi: Chronicles of Japan from the Earliest Times to A.D. 697. Vol. 1
Kegan Paul, Trench, Trüber, & Co
1896
다시라카가 태어나기 전, 할아버지 이치노베노 오시와 황자가 외할아버지 유랴쿠 천황에게 살해당했고, 아버지 오케(훗날의 닌켄 천황)와 삼촌 오케(훗날의 겐조 천황)는 도망쳐 숨어 지냈다. 그 뒤 아들이 없던 외숙부 세이네이 천황이 두 왕자를 찾아내어 대왕으로 맞이했다(동생 겐조 천황이 먼저 즉위).
이후 방계였던 아버지 닌켄 천황은 유랴쿠 천황의 딸 가스가노 오이라쓰메를 황후로 맞아들여, 각자의 조부 때부터 둘로 나뉘어 있던 야마토의 왕통은 하나로 합쳐졌다. 그 사이에 태어난 것이 부레쓰 천황과 다시라카 황녀이다.
두 왕통의 핏줄이 합쳐진 유일한 ‘남자’였던 부레쓰 천황은 자식을 두지 못하고 젊은 나이에 죽었다. 선대 유랴쿠 천황이 벌인 대대적인 왕족·호족 숙청 탓에 다른 남자 왕족은 거의 남아있지 않았고, 따라서 에치젠국에서 선대 오진 천황의 5세손이 되는 방계 왕족 오호도 왕이 오키미로 옹립된다(게이타이 천황). 오키미는 당시의 오오무라치(大連)였던 오토모노 카네무라의 권고에 따라 즉위 원년 3월 5일(507년 4월 2일), 다시라카 황녀를 오오키사키로 맞아들였고, 새로이 게이타이 천황의 통치가 시작되었다.
다시라카 황녀가 게이타이 천황의 오오키사키가 된 이유는 어머니 가스가노 오이라쓰메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방계로서 오키미가 된 게이타이의 정통성을 세우기 위한 정략적인 요인이 가장 큰 것으로 여겨진다. 즉 방계로서 선대 오키미와 혈연이 옅었던 게이타이는 선왕의 친여동생인 다시라카 황녀를 오오키사키로 함으로써 일종의 데릴사위 형태로 정통성을 얻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야마토에 들어가기 전에 이미 여러 명의 비(妃)들(오와리노 메코히메 등) 사이에서 여러 아이들(안칸 천황 ・ 센카 천황 등)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라카 소생의 왕자였던 아메쿠니오시하라키히로니와노 미코토|天国排開広庭尊일본어(훗날의 긴메이 천황)가 정식 계승자가 된 것도 이러한 추론을 뒷받침해준다.
게이타이와 다시라카 사이에 태어나 오키미가 되었던 긴메이 천황은 오늘날까지 일본 황실의 조상으로 남아있다. 왕통의 단절 위기를 구하고 부계로서는 아니지만 직계 핏줄을 후세에 이어지게 한 다시라카 황녀의 존재는 특별히 큰 것이라고 할 수 있다.
3. 자녀
4. 무덤
궁내청은 다시라카 황녀 금전릉으로 나라현덴리시 나카야마정에 있는 니시토노츠카 고분을 지정하고 있다. 니시토노츠카 고분은 야마토 고분군에 속하는 고분 시대 전기의 전방후원분이지만, 연대적으로 일치하지 않는다. 시라이시 다이치로는 야마토 고분군 중에서 단 1기만 비교적 대규모인 6세기대의 고분인 니시야마즈카 고분이 다시라카 황녀 금전릉이 아닐까라고 주장하고 있다.[3]
니시야마즈카 고분의 하니와는 이마시로즈카 고분과 마찬가지로 다카쓰키시의 신이케 유적에서 소성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6세기 전반경에 조성되었고 분구의 길이는 115m이다.
이에 대해 시라이시는 게이타이 천황이 야마토 왕통에 연결되는 다시라카 황녀의 묘를 야마토 왕권 시조들의 묘가 늘어선 야마토 고분군이나 야나기모토 고분군 안에 조성함으로써 자신의 왕권의 연속성·정통성을 주장한 것이 아닐까 추측하며, 게이타이조의 성립이 왕조 교체설에서 주장하는 왕통의 단절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보고 있다.[4]
5. 기타
게이타이 천황과 다시라카 황녀 사이에서 태어난 긴메이 천황은 오늘날까지 일본 황실의 조상으로 남아있다. 다시라카 황녀는 왕통의 단절 위기를 구하고, 비록 부계는 아니지만 직계 핏줄을 후세에 잇게 한 중요한 인물이다.
다시라카 황녀(수백향. 手白香)가 백제(百濟) 무령왕의 공주라는 주장은 어느 나라의 역사 기록에도 나오지 않는다. 백제(百濟) 무령왕의 공주라는 설은 재야 역사학자 문정창이 집필한 《일본상고사》에 나오는 가설일 뿐이다.[7]
참조
[2]
서적
日本書紀
[3]
서적
1993
[4]
서적
1993
[5]
문서
현재의 [[兵庫県]][[三木市]]を中心とする地域
[6]
서적
日本古代氏族人名辞典
1990
[7]
뉴스
제왕의 딸 수백향, 정말 백제 공주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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